2021년 1월 6일 수요일

삼각산의 파랑새

세월은 쉬지않고 흐르고 

이 세상은 평생 다 알 수가 없다 


한 백년 머물다가 

그 흔적을 잃게 되겠지  


소리 큰 소리 한껏 외쳐보아도 

삶의 능력은 거기까지 

 

삼십 여년 전 

삼각산 북한산장 근처 


작은 숲에 살던 

파랑새의 노래가 들려온다 


얼마나 

행복한 삶이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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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청공원약수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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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청공원약수터 :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는 생각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결국은 나의 시간의 종국이 죽음이라고 스스로도 내면화시키게 된다. 죽음은 나의 일인칭의 죽음 너의 이인칭의 죽음 그리고 그이의 삼인칭의 죽음이 있다. 오직 너의 죽음만을 우리는 나의 일부의 죽음이라고 볼 수 있을 뿐, 나의 죽음이나 그이의 죽음은 목격될 수도 없고 따라서 나의 영역에서 벗어나는 죽음이다. 또한 망각은 너의 죽음을 그이의 죽음으로 내몰기도 한다.

죽음은 시간을 발생시킨다. 인간이 지구위에서 영생하는 존재라면 굳이 시간을 엄밀하게 계수할 필요는 없다. 다만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은 필요한 듯싶다. 그것이 약속과 만남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우리는 쉽게 이 시계의 시간을 시간의 시금석으로 규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서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움직임, 운동이 존재할 뿐이고 그 매듭이 존재할 뿐이다. 이를 규칙성있게 배열한 것이 그 기준을 태양으로 하든 달로 하든 말이다. 모든 시간은 결코 절대적일 수 없다. 상대적이다. 사실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시간 기계라는 장치에 GPS를 붙여서 만든 감옥일뿐

이 모든 것의 배후에는 동일시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어린 시절 아이들은 무시간성 속에서 논다. 놀고 있는 아이들을 직접 찾아가서 이제 집에 돌아갈 때라고 알려주지 않으면 아이들은 계속해서 무시간성의 놀이에 빠져있다.

이후 부모와 선생들은 아이들에게 시간이라는 실체도 없는 단지 숫자와 바늘만 있는 기계장치를 내면화시키게 교육시킨다. 특히 등교시간에 지각이라도 하게 되면 벌을 받게 되면서 아이들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인 유치원시절에 이미 시간이라는 것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다는 허상을 내면화시키게 된다. 이후 이 시간이라는 허상은 날카로운 시계 바늘 같은 칼이 된다. 그리고 허상인 시간을 분할하는 것을 배운다.

이에 따라서 움직임의 차별이 발생한다. 9시라고 상정된 등교시간은 엄격한 대전제가 된다. 12시는 낮밥의 시간이라고 갈라놓는다. 주일날은 11시라고 절단한다. 시간은 연속적인 듯 하면서 이렇게 칼날을 품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미 이 칼날에 의해서 모든 것들은 재단되어져 있고 분절되어져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이 시간이라는 허상을 가격해서 함몰시키고 다시 새롭게 재창조하신다.

그것이 신학적으로는 인간을 삼켜버리는 마력을 지닌 크로노스를 혁파하여 그 허상을 드러내게 하는 카이로스다. 카이로스의 끌게장 안으로 들어오려면 시인의 언어처럼 우선 관조적이 될 수밖에 없다. 카이로스는 크로노스의 시간이 허상이며 인간을 속이고 절대자로 군림을 하고 있는 것을 다윗이 골리앗의 정수리를 돌맹이로 가격했듯이 그렇게 펼쳐진다.

시간과 세월은 비슷한 듯싶지만 매우 다른 언어이다. 시간은 이렇게 규정할 수 있다. 어떤 시각에서 어떤 시각과의 사이, 어떤 행동을 할 틈, 어떤 일을 하기로 정해진 사이, 때의 흐름 그리고 철학적으로 과거로부터 현재-미래로 무한히 연속하는 존재규정. 세월은 이렇게 규정된다. 해와 달로 헤아릴만한 지나가는 시간, 지내는 형편이나 재미, 시인은 전도서의 통찰을 끌어 오고 있다. 알고야 말겠다는 또는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인간의 노력이 이 문명을 잉태했다. 그러나 전도서의 현자처럼 시인은 쉬지 않고 흐르는 세월의 물줄기 앞에서는 겸손할 수밖에 없다. 이 겸손함을 통해서 시인은 크로노스의 괴물을 무찌르고 혁파한 카이로스의 지평을 제시한다.

소리, 큰소리를 외친다는 것은 삶의 몸부림이 맘부림이 되는 치열한 여정이다. 이 외침은 절박하다. 따라서 이 소리는 커질 수밖에 없다. 시인은 시간이라는 허상을 통찰하고 있는 것이다. 어쩔 수없이 조물주께서 우리의 날을 계수하심과 우리의 계수함이 선재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한 백년이라는 이 매듭의 새끼줄은 낡아지고 사그러들 수밖에 없음을 통찰한다. 이는 매우 겸손할 뿐만 아니라 관조할 수 있는 초월의 눈으로 세월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울어도 못하네 라는 찬송이 있다.

울어도 못 하네 눈물 많이 흘려도 겁을 없게 못하고
죄를 씻지 못하니 울어도 못하네
십자가에 달려서 예수고난 보셨네 나를 구원하실 이 예수밖에 없네

웃어도 보고 울어도 보아도 인생은 여기까지인 것이다. 삶의 몸부림과 맘부림이 여기까지라고 받아들 수 있는 지평은 그렇게 쉽게 펼쳐지지 않는다. 자신의 오고 감을 깨닫지 못한 이들은 나이가 들수록 시나브로 노욕의 고약함에 쩔어든다. 이들은 이것을 무슨 대단히 감투나 훈장으로 둔갑시키기 위해서 어리석은 선택을 하고서도 자신의 입장을 강변하고 강요한다. 주워진 삶이, 그 능력이 여기까지임을 깨닫고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북한산이라는 호칭은 일제 강점기에 그들이 강요하고 협박하면서 고정화시킨 명칭이다. 등산을 좋아하는 이들은 잘 알고 있지만 본래 북한산이라는 명칭은 삼각산이였다. 시인은 그 사연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늘 본래의 자신의 모습, 진면목이 어떠한지를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나 어때?”라는 말을 타인에게 자주한다. 그러나 보여지는 진면목만이 다라면 우리는 얼마든지 교언영색해도 무방하다. 그것이 능력이 될 수 있는 세상과 세월의 흐름앞에 우리는 서 있다. 잘 믿고 잘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잘 믿는 척하고 잘 사는 척하는 것이 중요하다. 십계명의 열 개의 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상관없으며 제11계명 들키지 말라 를 내면화시킨 이들이 얼마나 수두룩한가 말이다.

북한산을 삼각산으로 불러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만큼 이름은 중요하다. 그 이름이 어떠한 역사를 지녔는지를 제대로 알려면 우리는 다석 유영모처럼 제소리로 살아야 한다. 파랑새의 노래소리를 아무나 듣는 것은 아니다. 그 소리를 먼저 들은 이가 주위에 들어보라고 말할 수 있다. 모든 귀는 열려있지만 그 귀로 아름다운 소리를 포획하는 이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시인의 귀에는 삼십년이 넘어가는 격차가 있어도 그 소리를 불러내어 기억하고 있다. 그 새의 이름은 파랑새다.

파랑새는 몸길이가 28cm가량되는 선명한 청록색에 머리와 꽁지는 흑색이며, 부리와 다리는 선명한 산호색을 띤 새다. 우리는 보통 파랑새를 푸른 빛깔을 띤 길조를 상징하는 새로 받아 들인다. 뒤돌아 보면 삶의 모든 과정이 크로노스의 그물망을 벗어난 카이로스의 파랑새 소리와 함께하는 것임을 시인은 아주 차분하고 평이하게 동시처럼 들려주고 있다. 그 카이로스의 끌게장안에서 시인은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인을 울어도 못하네라는 찬송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종결할 수 있다. 생의 그 치열함이 오롯하게 새겨지는 세월의 흔적앞에서 겸손하며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시를 갈무리한다.

“얼마나 행복한 삶이 였던가 ?”

글/박운양 전도사
202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