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12일 화요일

만남과 나눔

만남과 나눔이 

삶의 내용이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그것을 중단시켰다 


만남이 아름답지 못하고 

나눔이 덕스럽지 못해서일까 


만나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게 되었다 


왜? 

도대체 왜? 


온 인류가 집에 머물며 

반성의 시간을 갖고 있다 


다시 

세월의 문이 열리면 


다시 꽃피고 새가 우는 

아름다운 봄이 오면 


새에게 물어보리라 

그 꽃들에게 물어보리라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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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개:

삼청공원약수터 :

(박운양 전도사의 답글)
삶의 내용은 무엇일까? 이것은 쉽게 해명될 수 없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심하게 겪고 있는 이들은 당근 돈이라고 할 것이다. 책읽고 연구하기를 즐기는 이들은 학문이라고 할 것이다. 예술지상주의자들은 당연히 예술이라고 할 것이다. 이것은 참 쉽지 않은 질문이다. 삶의 내용은 무엇일까? 라는 질문을 갖게 되는 상황과 시기는 무엇이고 언제일까? 형식은 껍데기에 해당하고 내용은 알맹이에 해당하는가? 아니면 껍데기와 알맹이를 분리시키지 않고 내용과 형식을 분리시키지 않고 삶을 바랄 볼수는 없을까? 이 질문을 계속해서 수많은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시인은 시가 시작하면서 바로 그 답을 제시한다. 삶의 내용은 만남과 나눔이라고 말이다. 그럼 만남은 무엇인가? 만남은 꽃이 나비가 되는 것이다. 꽃이 나비가 되려면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러야 할까? 지구의 역사 속에서 살펴보자면 수억년의 시간이 흘렀을 때야 비로서 곤충에서 초식동물로 이어지게 된다. 그러나 시인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꽃의 간절함과 시기의 다툼과 질시가 결정체를 이뤄서 어느 순간 나비가 출현했다라고 볼 수 있다. 만남이 간절할 수록 만남의 순도는 높아진다. 어쩌면 간절함이 없는 만남은 만남이 아닌지도 모른다. 만남은 남에게 지금 내 앞에 있는 이에게 만을 주는 것이다. 충만을 주는 것이다. 모든 것을 주는 것이다. 이미 등뒤로 계산기를 감추는 것은 거래이지 만남이 아니다. 간절함이 일천한 만남은 형식만 있고 내용은 없는 만남이다. 자 바로 여기서 삶의 내용이 만남이라는 것을 충분히 살펴보고 규정할 수 있다.

그럼 또다른 측면에서 나눔이 어떻게 삶의 내용이 될 수 있는가? 나눔은 하나의 덩어리를 쪼개는 것인가? 단지 산술적으로 N분의 1이 되는 것이 나눔인가? 사실 사칙연산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 나누기이긴 하다. 더하기 빼기 곱하기는 그럴싸하게 하는데 나누기에서는 쉽지 않게 막혀 버린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나누는 것은 참 어려운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오병이어의 표징을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주님은 이 나눔의 힘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보여 주신다. 한 아이가 예수께 드렸던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가 어떻게 오천명이상을 먹일 수 있었을까? 그 출발은 자신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이 아이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의 헌신과 사랑이 아닐까? 나눔은 역설적이다. 자꾸 줄어 들어야 하는데 화수분처럼 계속해서 늘어 난다. 따라서 문제는 타락한 나눔이다. 타락한 나눔은 만남의 관점에 비추어 보아도 그것은 상대에게 만을 충만을 주는 것이 아니다. 항상 뒤를 돌아보고 등뒤의 계산기를 두드려 본 다음에 결정하는 것이다. 이 타락한 나눔은 서로의 잇속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물론 상인들에게도 예외가 있다. 도산하고 파산한 이들도 기존에 유지되었던 신용이 살아 있는 한 다시 재기할 수 있다. 그러나 신용카드가 정말 신용이 우선되는 카드일까? 아니다. 그건 빚카드다. 자신의 벌이의 형편을 감지하지 못하고 마구 긁어 데다가 후회하게 되기 때문에 그것은 신용카드가 아니라 후회카드다. 투명한 거래는 신용을 낳게되지만 그 한계도 명확하다. 그 신용은 실리를 위한 신용이지 그 차원을 넘어서 까지 존재할 수 있는 그런 신용은 아니다. 이에 반해서 진정한 나눔은 내가 놈이 되는 것이다. 내 나 눔 놈이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나눔은 상대를 위해서 나를 낮추는 것이다. 서로 낮추게 되면 물은 시나브로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산정상에서 계곡으로 흘러가듯이 그래서 냇가로 강으로 바다로 흘러가듯이 나눔은 나를 낮추어서 계속해서 흘러가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의 나눔있는 곳에는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 하나님의 시선을 늘 아래를 향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가장 낮은 가장 어린 아이들이야말로 하늘나라에 가장 가깝다고 하셨다. 또한 만남과 나눔은 서로 뗄레야 뗄수 없는 관계를 이루고 있다. 나눔이 없는 만남은 장사꾼들의 농간으로 전락하기 일수고 만남이 없는 나눔은 알맹이 없는 쭉정이로 전락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이제 왜 시인이 단정적으로 삶의 내용이 만남과 나눔이라고 가리킨 이유의 윤곽을 희미하게나마 그 실루엣을 포착할 수 있다. 시인은 코로나를 비관적으로 보지 않는다. 다만 코로나로 초래된 현실의 실상을 짚어내고 있다. 아름답지 못한 만남은 추한 만남이다. 이기적인 만남이다. 덕스럽지 못한 나눔은 예의없는 만남이고 성의없는 만남이다. 코로나는 비대면 상황을 초래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는 이승만의 구호는 이제 작금의 실상 속에서는 뭉치고 죽고 흩어지면 산다라고 바뀌었다 따라서 전화나 카톡이나 줌같은 장치가 없으면 소통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직접대면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얼굴과 얼굴을 맞데어 보는 의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는 차원을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13장 12절에서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다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시는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유리벽에서 미끄러지는 강화유리 위에 스마트폰처럼 우리는 만남에 미끄러져 왔다.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잘 랐다. 그저 제흥에 겨워서 흥청망청하면서 살아왔다. 이제 만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게 되자. 사람들은 얼굴과 얼굴을 대면한 듯이 여겼던 시절을 그리워한다. 세월의 문이 열리려면 시인은 다음과 같은 전제를 제시하고 있다. 집에 머물면서 반성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말이다. 그동안 흩어졌던 에너지를 집중시키기 위해서 집에 머물러야 한다. 계집의 집이 무엇인가? 울타리 안 집의 안주인이다. 집안의 게를 세우고 살림이 되도록 하는 이다. 반성반성과 성찰의 시간을 갖지 못하면 집에 머무는 것은 동선의 협소함협소함여서 시나브로 이기적인 싸움질로 번질 수 있다. 이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부모와 자식이 싸우고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싸우는 지경이다. 집에 머물러 성찰해야만 다시 세월의 문이 열릴 거라고 넌지시 제시한다. 따라서 코로나는 역설적으로 은총의 매개체다. 일정한 공간에 머물로 반성하는 것 그것이 바로 두팔의 모든 에너지를 두 손에 합생시키는 기도가 아니면 무엇이랴. 과정신학은 좀 복잡하고 어려운 측면이 있지만 핵심적으로 단순화시키면 잠언의 대표적인 말씀과 맥락이 통한다. 사람이 그 길을 계획할찌라도 그 길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 시니라 라고 말이다. 우리를 코로나로 일상이 무너졌다고 말하지만 그동안 우리가 누려왔던 일상이 과연 온전한 일상이였는가? 압축시켜서 말해서 욕망과 탐욕의 충혈된 눈처럼 타락한 일상이 아니였던가? 이제 조물주께서는 코로나라는 계기로 우리가 근본을 향해서 재정향할 것을 가리키시고 있다. 꽃은 그냥 피는 것이 아니다. 봄은 그냥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단지 박신을 접종하고 면역력이 압도적인 힘을 발휘하게 되어서 마스크를 벗을 수 있게 된다고 해결될 수 있는 차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시인은 새 그때 그 산에서 보았던 파랑새 그리고 나비가 되었던 그 꽃들에게 물어보라고 한다. 그 소리를 듣고 그 가냘픈 잎을 만질 수 있는 깨어있는 감각이 살아 있어야만 우리는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번짓수를 찾지못했던 그동안의 저열한 만남과 강변하고 어거지로 당위성으로 몰고갔던 나눔은 이제 꽃과 새를 통해서 새롭게 거듭나야만한다. 이런 식이라면 대면국면으로 돌아가도 도루묵이 될 것이 명약관화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