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 30일 수요일

두 밤 남은 2020년

해가 지고 해가 뜨면 

하루가 지나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이 가면 

한 해가 간다 


아니다 

그냥 졸려서 잠들었고  


잠에서 깨면 

날이 밝아있었다 


기다리지 않아도

꽃피는 봄이 왔고 


그렁구리 

다시 겨울이 왔다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생각하는 마음이다 


더 아름다운 봄은 없을까 

더 멋있는 여름과 가을 

그리고 겨울은 없을까  


그렇게 궁리하며 

한 해를 보낸다 


새삼스러운 삶의 의미와 보람 

그건 

창조주 하나님께서 잘 알고 계시겠지 


2020년이 다 갔다 

다시 2021년이 시작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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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개:

삼청공원약수터 :



해가 지고 해가 뜨면
하루가 지나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이 가면
한 해가 간다

아니다
그냥 졸려서 잠들었고

잠에서 깨면
날이 밝아있었다

시인은 시간이 시계로 측정되는 객관적인 시간이 있고 개인의 주관적인 시계가 있음을 넌지시 알려주고 있다. 사실 해가 지고 해가 뜨면 하루가 지나는 것이 아니라 해가 뜨고 해가 져야 하루가 지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한날을 한해로 보게 되면 적절한 말이다. 한해가 지고 한해가 뜨기 때문이다. 또한 시인은 잠을 기준으로 시간을 규정한다. 책에 빠져서 밤을 지세운 이는 낮에 잠을 잔다. 개인적으로는 시간의 중심에 잠이 있다. 잠이 들면 한해가 가고 잠에서 깨면 해가 밝아 있다.

이 개인적인 시간은 사계절을 통해서 구체화된다. 계절은 늘 겨울인이도 있고 늘 가을인 이도 있고 늘 여름인 이도 있고 늘 봄인이도 있다. 늘봄은 남북역사의 큰 획을 그은 문익환의 호다. 이 네 개의 매듭의 다리가 있어야 생이라는 365일 다양한 잔치상이 펼쳐질 수 있다.

기다리지 않아도
꽃피는 봄이 왔고

그렁구리
다시 겨울이 왔다

기다리지 않아도 꽃피는 봄이 왔지만 시나브로 겨울이다. 기다림은 기를 다리는 것이다. 기다림은 이미 모두 다 임재한 것이다. 기다리지 않고서 찾아오는 봄은 뜻밖의 조우다. 꽃이 핀 것을 보고서 깜짝 놀라며 봄이 왔음을 안다. 집 처마로 날아드는 제비를 보고서 봄이 오는 것을 안다. 그렁구리 겨울도 싸늘한 얼음을 보면 휘날리는 눈꽃송이를 보면 찾아왔음을 안다. 아니 느낀다. 하여 기다리지 않음은 역설적으로 충만한 기다림이다. 충만한 깨어있음은 갑작스런 계절의 돌격에 놀라지 않는다.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생각하는 마음이다

더 아름다운 봄은 없을까
더 멋있는 여름과 가을
그리고 겨울은 없을까

그렇게 궁리하며
한 해를 보낸다

생각과 궁리는 같은 듯 하면서도 다르다. 궁리에는 보다 절박한 몸부림과 맘부림이 있다. 궁리는 사물의 이치를 깊이 연구한다는 의미와 마음 속으로 이리저리 따져 깊이 생각하는 것이다. 모든 있음은 없음의 확인과정을 다 거쳐야만 드러난다. 궁리란 그런 것이다. 하나씩 하나씩 아님을 확인하고 확인해서야 도달하게 되는 과정이다. 생각은 사람이 미래를 써서 사물을 헤아리고 인식하고 판단하는 작용이라고 보기도 하고 어떤 것에 대한 의견이나 느낌을 말하기도 하며 머릿속으로 그리는 상상이나 상념을 가리키기도하고 어떤 것에 대한 기억을 의미하기도 하며 작정과 각오의 의미로도 쓰이며 관심과 욕구를 지칭하기도 하고 마지막으로 사리를 분별하는 것을 의미한다. 생각은 매우 큰 연장도구세트이다. 그 도구 중 망치를 궁리라고 할 수 있다. 송곳을 궁리라는 연장도구라고 할 수도 있다. 궁리는 내 생각의 고정관념을 내리치는 것이다. 송곳은 적절한 곳이 파악되면 파열시켜서 뚫어버리는 것이다.

시인은 생각하는 마음이야말로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통찰한다. 생각하면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이 생각은 간절함을 품고 있다. 생각한다는 것은 그저 스쳐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각(生角))을 세우는 것이다. 망상이나 비굴한 생각은 생각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각이 아니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각은 정곡을 찌른다. 봄이 아름답고 여름과 가을이 멋지고 소탈하게 아무 수식어가 없는 겨울은 모두 살아있는 각 속에서 새롭게 조명된다. 그러고 보면 이 생각 살아있는 각이야 말로 궁리다. 궁리는 날을 벼리는 것이다. 새롭게 배치하는 것이다. 궁즉통이라 했다. 궁리가 임계점에 도달하면서 한 해를 보낸다

새삼스러운
삶의 의미와 보람

그건
창조주 하나님께서
잘 알고 계시겠지

시인은 겸손하다. 결국 구원된 생각은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넌지시 고백한다. 무엇보다도 그 하나님은 조물주 다시 말해서 창조주다. 이 모든 것이 섭리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시인은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주파수가 늘 창조주 하나님과 연결되어져 있는 이들은 불안하지 않다. 초조하지 않다. 그대로 섭리가 인도하시는 대로 오면 막지 않고 가도 아쉬워하지 않는다.

2020년이
다 갔다

다시
2021년이 시작되겠지

새해는 12.31과 1.1 사이에 있다고 보지만 그렇지 않다. 한 해를 생각을 벼린자만이 한 해를 맞이할 수 있다. 보낸다는 것은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이다. 새로운 시작은 그 날선 살아있는 생각이 도달한 궁리 속에서 12개월 365일이 걸려서 출산되는 아기라고 할 수 있다. 머리는 망각이라는 원죄 속에서 자유롭지 못하지만 맘부림이 몸부림으로 가면 몸이 기억한다. 기억은 새로운 탄생을 위해서 불가피하다. 새로운 기억은 새로운 깨달음에 도달하고 새로운 생각을 잉태하고 그 속에서 궁리라는 아기를 탄생시킨다. 궁리는 이미 답을 얻고 있는 것이다. 그 범주가 정해지면 일년의 고통과 기쁨은 새로운 아기를 탄생시킬 수 있다. 따라서 생각이 궁리가 될 때까지 몸조심 맘조심을 해야 한다. 임신부가 몸을 귀하게 여기며 조심하듯이 말이다.

모든 객관적인 시간은 분절을 통해서 존재한다. 그러나 잠을 가운데 두고서도 개인의 시간은 존재할 수 있다. 한해를 뒤돌아 보고 새해를 맞이한다는 것은 온고지신과 새술은 새부대에 담겨져야 한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통찰이 합생된 것이다. 한해동안 참된 것을 찾아서 생각하고 궁리한 이들이야말로 새해를 맞이할 자격이 있다. 그러나 이는 작위적으로 접근되어서는 곤란하다. 리듬을 타고 흐르는 물처럼 2020년을 보내고 다시 2021년을 시작하자.
2020.12.30.
(박운양 전도사)